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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일:2월14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글쓴이 : 정영희(삐아)     날짜 : 09-02-14 11:52     조회 : 307    
 
 
 
축일:2월14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성 치릴로 수도자
St. Cyrillus
San Cirillo Monaco, apostolo degli Slavi
Tessalonica(attuale Salonicco,Grecia),inizio sec.IX
- Roma, 14 febbraio 869
Born:827 at Thessalonica, Greece as Constantin
Died:14 February 869 at Rome, Italy
Apostle of the Slavs
 
 
성 메토디오 주교
St. Methodius
San Metodio Vescovo, apostolo degli Slavi
Tessalonica(attuale Salonicco,Grecia),inizio sec.IX
- Velehrad, Cecoslovacchia, 6 aprile 885
Born :826 at Thessalonica
Died :6 April 885 at Moravia (Czechoslovakia)
Apostle of the Slavs
 
 
 
치릴로는 데살로니카에서 태어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형 메토디오와 함께 모리비아에 가서 신앙을 전파했다.
 
이 두 사람은 자기들이 창안한 치릴로식 알파벳을 사용하여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치릴로는 로마에 부름을 받아 갔으며 그 곳에서 869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메토디오는 주교가 되어 헝가리의 판노니아에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반대파들의 질투심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언제나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체코스로바키아의 벨레라드에서 885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슬라비어로 된 [콘스탄티누스 치릴로의 생애]에서
(Cap. 18: Denkschriften der kaiserl.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 wien 1970, p. 246)
 
당신 교회를 길러 주시고 모든 이를 일치 안에 모아 주소서
 
콘스탄티누스 치릴로는 많은 격무로 인해 몸이 지쳐 병이 들고 말았다.
여러 날 동안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하느님의 환시를 보고 다음 말로써 찬미의 노래를 시작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거룩한 옷을 입고 나서 온종일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황제의 종도 이 지상의 어떤 인간의 종도 아닌 전능하신 하느님의 종일 뿐이다.
과거에 나는 죽어 있었지만 지금 살아나 영원히 존재하리라. 아멘."
다음날 수도복을 입고는 빛에다 빛을 더하듯이 치릴로(촛불이라는 뜻)라는 수도명을 취했으며,
이 수도복을 입고 50일 동안 수도자로 살았다.
 
영원한 안식을 얻을 시간이 다가와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본향으로 옮겨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손을 쳐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하느님이신 주여, 당신께서는 모든 계급의 천사들과 영의 권세들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은 하늘을 펼치시어 땅을 견고히 하시고 만물을 무에서 존재에로 이끄셨습니다.
주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뜻을 행하시며 당신을 공경하고 계명을 지키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제 기도를 들어 주시어 당신께서 이 무능하고 무가치한 종인 저에게 맡기신
당신의 충실한 양 떼를 안전히 지켜 주소서.
 
당신을 모독하는 이들의 불신앙과 사악에서 그들을 지켜주시고
당신의 교회를 길러 주시며 모든 이를 일치안에 모아 주소서.
당신 백성이 주님의 참된 신앙 안에서 일치하며 그 신앙을 고백하게 해주시고,
그들 마음에 당신 교훈의 말씀을 불어넣어 주소서.
형제들에게 선한 생활을 하고 당신 마음에 드는 일을 행하도록 격려하는,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자로서
우리를 받아들여 주신 것은 오로지 당신의 은총입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이제 당신 것으로 되돌려 드립니다.
주님의 힘센 오른팔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당신 날개 그늘 아래 들게 하시어,
그들 모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당신 이름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
 
모든 사람에게 거룩한 입맞춤을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원수의 이빨에 먹이로 넘겨주지 않으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원수들의 덫을 끊으시고 그 멸망의 수중에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42세를 일기로 주님 안에서 잠들었다.
교황은 로마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인들과 로마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그거룩한 분의 장례를 마치 교황 자신의 장례처럼 거행하고 노래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가톨릭홈에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그들의 아버지가 슬라브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희랍 지방의 관리였기 때문에,
이 두 희랍 형제는 결국 슬라브 민족의 선교사,스승,수호 성인이 되었다.
훌륭한 학문 연구의 과정을 마친 다음 치릴로-죽기 얼마 전 수사가 될 때까지는 콘스탄티노롤 불렸다-는 형과 마찬가지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백성들의 총독이 되라는 것을 거절했다.
그는 형 메토디오가 총독의 직책에 몇 년 있다가 사임하고 수사가 된 그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들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온 것은 모라비아(현재의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의 공작이 동로마 황제 미카엘 3세에게
독일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과 종교적 자율권-그들 자신의 성직자와 전례를 갖는 것-을 요구했을 때였다.
이때부터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치릴로가 한 첫번째 일은 슬라브어의 알파벳을 만든 것으로서 아마도 유고슬라비아의 전례에서 아직도 쓰일 것이다.
그의 후계자들은 희랍어의 대문자에서 치릴로 알파벳(현대 러시아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 형제는 함께 복음과 시편,바울로 사도의 편지 전례서 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그 당시에 매우 부정확하던 슬라브 전례를 만들었다.
 
이러한 일과 그들이 자유로이 모국어를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은 독일 성직자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독일 주교가 슬라브 주교들과 사제들의 서품을 거부하자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로마에 탄원을 하였다.
그들은 로마에 가서 그들의 새로운 전례가 교황 하드리아노 2세의 인준을 받게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치릴로는 오랫동안 수도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로마에서 수도복을 받은 지 50일 만에 죽었다.
 
 
치릴로가 죽은 뒤에도 메토디오는 16년 동안이나 선교 사업을 더 계속했다.
그는 교황 사절로서 모든 슬라브 민족에게 파견되었으며 주교를 서품하고 그곳에 주교좌를 마련했다(현재의 유고슬라비아)
바바리아의 주교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종전 관할 구역 대부분이
그들의 관할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메토디오에 대하여 맹렬한 비난과 고발로 맞섰다.
그 결과 독일의 루드비히 황제는 메토디오를 3년 동안 귀양보냈으나 교황 요한 8세가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여전히 감정을 품고 있던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계속해서 메토디오를 이단자라고 고발했고
이에 메토디오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로마에 가야만 했으며 슬라브의 전례 사용을 계속 주장했다.
그는 다시 한번 누명을 벗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메토디오가 성서 전체를 8개월 만에 슬라브어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열렬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주교좌 성당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성목요일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반대는 계속되어 모라비아에서 이룬 이 형제들의 업적은 수포로 돌아갔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의 추방은 이 형제들의 영적,전례적,문화적 업적을 불가리아,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폴란드에까지 퍼뜨리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모라비아의 수호 성인으로서,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와 크로아티아등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희랍 정교회안에서 공경을 받고 있는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동방과 서방의 오랜 숙원인 교회 일치를 보장하는 데 매우 적합한 인물들이다.
 
 
성덕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인간 생활에 응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인간 생활, 정치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이기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들이 서로 엇갈리는 생활이다.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매일같이 짊어진 십자가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문제로써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 즉 전례 언어의 문제이다.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성인이 된 것은
그들이 전례를 슬라브어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과 용기로 써 그것을 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이나 공익에 관계 없는 일에
엄격한 통일성을 강요하고자 하지 않으며, 전례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오히려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은 이를 보호 육성한다.
 
로마식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을 보존하는 조건하에 여러단체, 지역, 민족,
특히 포교 지방에 합법적 다양성과 적응의 길을 열어줄 것이니 이는 전례서를 개정할 때에도 그러하다’
(전례헌장,37-38항)
 
 
이들은 희랍의 테쌀로니카 태생인 형제들로서 원로원의 자녀였다.
치릴로는 콘스탄띠노라는 이름으로 영세하고,
어린 나이에 콘스탄티노블의 왕립 확교에 보내져서 포씨우스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사제가 되었으며,
그 후 그 대학교에서 스승 포씨우스를 능가하는 교수가 되었다.
 
메토디오는 옵시키온 지방의 슬라브 식민지 가운데 한 지역을 맡는 총독이 되었다가, 사직한 후로는 은수자가 되었다.
이들 형제들은 보스포루스의 어느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황제 미카엘 3세가 러시아의 드니에퍼-볼가에 있는 카쟈르복들을 회개시키도록 파견하자,
그들은 카쟈르 언어를 배워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돌아올 즈음에, 메토디오는 희랍의 어느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863년에는, 모라비아의 로스티슬라브 왕자인 포씨우스의 요청에 따라 모라비아인들의 개종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비록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두 형제의 슬라브어 실력은 대단하였다.
 
 
그들은 글라골로틱이라 부르는 알파벳을 창안하였는데, 이것이 슬라브어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치릴로는 메토디오의 도움을 얻어서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독일 성직자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한 것과
또 그들이 콘스탄티노블에서 왔으므로, 혹시 서방교회의 이단의 일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파쏘의 독일 주교가 사제 후보자 선발을 거부한 것이 그들의 선교활동에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
 
이 사건으로 두 형제가 교황 니콜라스 1세로부터 소환되었는데,
그들이 로마로 가던 중에 교황이 서거하였으므로,
그들은 아드리아노 2세 교황에게 크리미아에서 서거하신 교황 성 클레멘스의 유해를 인도하였으므로,
따듯한 영접을 받았다.
 
아드리안 교황은 그들의 정통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또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을 인가하였으며, 그들이 주교로 승품되었음을 공포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에, 치릴로는 수도자가 되었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 후 얼마 뒤에,
즉 2월 14일에 로마에서 운명하여 산 끌레멘떼 성당에 안장되었다.
 
한편 메토디오는 주교로서 모라비아로 돌아갔다.
아드리아노 교황은 모라비아와 판노니아를 독일 교계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메토디오를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레라트에서 대주교로 착좌시켰다.
 
870년, 독일의 왕 루도비꼬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 시노드에서 메토디오를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그를 가두었다.
그는 2년 후에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석방되어 자기 교구로 돌아갈수 있었다.
요한 교황은 정책적으로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만 제한하였던 것이다.
메토디오는 878년에 재차 로마로 소환되었는데, 또 다시 그의 정통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고 또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였다.
그 후 그는 치릴로와 함게 시작했던 성서 번역을 계속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블로 갔다.
독일 교회와 메토디오간의 투쟁은 그의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윽고 이 모든 투쟁은 그가 스타레 메스토에서 서거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힘든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치릴로는 "슬라브의 사도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의 전례는 오늘의 러시아 전례가 되었으니, 러시아, 세르브스,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오는 것이다.
그들의 축일이 전세계로 확대된 것은 1880년, 레오 13세에 의하여 비로소 이루어졌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슬라브 민족은 본래 동부에 있는 대 평야, 즉 중앙 아시아 지방에 정착했으나,
그 후 차차 발칸 반도를 거쳐 중앙 유럽 즉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민족이 그리스도교의 빛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발칸에 진출할 때부터였으나
당시는 소란스러운 시대였으므로 전 민족이 그리스도교를 봉행할 수는 없었다.
특히 중부 유럽지방에 진출한 이들은 귀화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는 성인들을 파견하셨다.
 
그 중에 유명한 분은 치릴로와 메토디오 두 성인이다.
이 두 분은 테살로니카 시의 레오라는 고관의 자손으로서 형제였다.
테살로니카는 옛적에 성 바오로께서 전교하시던 곳이요, 현재는 살로니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당시는 각국과 거래하는 일대 무역 항구로서 그 시외에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 성장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풍습과 언어를 습득했고,
후에는 그들의 사도로서의 소양을 얻은 것이니,이 역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테살로니카에는 훌륭한 학교가 적지 않아서 이 두 분은 마음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메토디오는 재질이 풍부하며 아버지와 같이 관리가 되었으나 곧 출세하여 테살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 생활을 싫어하여 관직을 은퇴하고, 엄격하고 경건한 생활을 택했다.
 
그의 동생 치릴로는 콘스탄티노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역시 재능이 뛰어 나고 학식이 출중한 청년으로,
궁중에 근무하여 영예그러운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그도 오히려 이를 싫어하고 은퇴해 어떤 조그마한 섬에 숨어 살았다.
 
그가 다시 발각되어 궁중에 되돌아갔을 때 황제는 명령으로 철학 교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는 회교와 유다교와 논쟁이 벌어진 때였다.
그는 황제 미카엘의 칙서를 받고 그 해박한 지식으로 이교도들과 논쟁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갔다.
그곳에서 성공리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곧 그 형 메토디오와 더불어
흑해(黑海) 지방의 민족을 회개시키기 위해 파견되었고, 그곳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862년,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이 미카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의 원도를 간청했다.
그 내용은 그들이 천주교를 봉행하기는 하지만 대세를 억눌려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교리에 무지하니
이를 인도하고 가르칠만한 지도자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다시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모라비오에 파견했다. 그들은 이를 대환영했다.
치릴로는 이미 사제의 품을 받았었고,
형제는 협력하여 많은 신자들을 교도하고 강론과 교회 예식으로써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슬라브족이 아직 글자를 가지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창안한 치릴로식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것으로 성서와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슬라브 문학의 시조는 성 치릴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모라비아 인들은 훌륭한 천주교 신자로 양성한 두 형제는 그 곳에 3년 동안 체류하고,
그 후 교황의 축복도 받고 자기들을 비난하는 이들에 대한 변명도 할 겸 로마로 향했다.
이에 교황 아드리아노께서는 이 두 분을 매우 반갑게 영접하시고 모라비아에 있어서의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시어
메토디오를 사제로,치릴로를 주교로 승급시키려 했으나,
 
치릴로는 장구한 세월동안 활동과 노고에 힘이 쇠진해 로마에 있는 어떤 수도원에 은퇴하여
수도 서원을 발한 후 50일만에 하늘로 향했다.때는 869년 2월 14일이었다.
 
메토디오는 형 대신 주교로 임명되었다.그는 다시 모라비아로 귀환했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포교 사럽에 이바지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찬노니아로 가서 그 지방민의 회개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허락 없이 그 지방에서 전교했다는 죄목으로 소송되고 구속 되었으나, 교황께서는 이를 곧 석방케 하셨다.
 
메토디오는 그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장애와 비난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교황의 옹호를 받았다.
세 번째 소송을 당했을 때, 그는 자신을 변명할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때는 885년 4월 6일이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장애를 겪은 두 형제의 전교 사업은 후일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고,그들의 노고는 일월과 같이 빛나,  
그들은 슬라브 민족의 사도로서 지금도 온 교회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